법원 내부 비리에 대한 수사 확대를 저지하려 수사기밀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된 이태종 전 서울서부지법원장이 지난 1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선고공판이 끝난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6부는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및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로 기소된 이 전 법원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연합뉴스
“30년 넘게 일선 법원에서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재판을 해온 한 법관의 훼손된 명예가 조금이나마 회복될 수 있어 정말 기쁩니다.” 지난 18일 서울 서초구 서울법원종합청사 출구 앞. 취재진에 둘러싸인 이태종 전 서울서부지법원장(현 수원고법 부장판사)이 이렇게 말했다. 벅차오른 듯, 그는 허리춤에 붙인 양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검찰의 기소가 무리했다고 보는지”, “수원고법으로 복귀하는데 심정이 어떤지” 묻는 취재진 질문에는 답하지 않은 채 허리 숙여 꾸벅 인사한 뒤 법원을 나섰다. 그가 피고인으로 섰던 사법농단 재판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직후였다. 이 전 법원장은 서울서부지법원장으로 일하던 2016년 8월 법원 집행관사무소 사무원들의 비리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나상훈 당시 서울서부지법 기획법관과 공모해 영장재판에 올라온 수사 기밀 등을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보고한 혐의(공무상 비밀누설)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2016년 4월 ‘정운호 게이트’가 터진 뒤 집행관사무소 비리 사건까지 알려지자 법원행정처가 검찰 수사 확대를 저지하려 했고, 이에 따라 이 전 법원장이 기획법관에게 검찰 수사 기밀을 수집·보고하는 것을 지시·승인했다는 취지다. 당시 양승태 대법원이 이 사건이 대법원의 사법정책 추진에 걸림돌이 될까 우려했다고 검찰은 봤다.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26부, 재판장 김래니)는 “범죄가 증명되지 않았다”며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나상훈 기획법관→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이어지는 정보 유통 흐름에 이 전 법원장은 실질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고 봤다. 71쪽 분량의 1심 판결문에 피고인만큼 자주 등장하는 나상훈 판사가 법원장을 제치고 법원행정처에 수사 기밀을 직접 전달했다는 결론이었다.
2016년 서울서부지법 소속 집행관사무원의 비리 사건이 터졌다. 서울서부지법 집행관사무원 등이 강제집행 현장에 동원되는 인력을 부풀려 인건비를 가로채고, 강제집행 물건을 보관해주는 특정 업체에 일감을 몰아주고 알선비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8월 서울서부지검이 수사에 착수했다. 11월까지 22건의 구속영장과 압수·수색영장이 서울서부지법에 청구됐다. 조미옥·박민우 서울서부지법 영장전담판사가 앉은 법대 위로 각종 영장청구서와 검찰 수사 기록이 올라왔다. 그 무렵인 2016년 9월, 나상훈 판사에 따르면 그는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근무했을 때 알게 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검찰이 집행관사무원 비리 사건에 대한 수사를 진행 중인 것 같은데, 상황 파악을 해서 보고하고, 추가 중요 변화가 있으면 보고해달라.” 서울서부지법의 기획법관이자 공보관인 나상훈 판사는 영장전담판사의 법대 위에 올라간 수사 정보를 깨알같이 수집했다. 감사 활동을 하던 법원 직원들이 수집한 정보가 나 판사에게 공유됐다. 압수·수색영장청구서, 관련자의 검찰 진술 내용이 서부지법 총무과를 통해 나 판사에게 전달됐다. 나 판사는 영장전담판사에게 검찰 수사가 다른 법원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는지 묻거나 피의자 체포영장 청구 수사 기록 중 특정 보고서를 복사해 가기도 했다. 증인신문에 출석한 당시 영장전담판사는 공보 업무에 활용될 거라 판단해 나 판사에게 수사 정보를 공유했을 뿐, 법원행정처에 보고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4월16일 당시 이 전 법원장의
재판에 출석한 조미옥 판사의 증인 신문 요지를 재구성했다. “나상훈 판사가 당시 검찰 수사 확대 가능성에 대해 증인에게 물어봤습니까.”(검사) “네. 확대 가능성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문제될 게 없다고 판단했습니다.”(조미옥 판사) “증인은 검찰에서 ‘일반적으로 집행관 비리가 터지면 (사람들은) 법원 비리로 생각한다. (법원이) 이를 우려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지요.”(검사) “네. 언론은 집행관사무원을 법원 직원으로 표현합니다. 집행관사무원은 법원 직원이 아닙니다. 그런데 국민은 법원 직원이라 판단하고 법원이 그들을 비호한다고 생각합니다. 법관 생활 하면서 집행관사무소 비리가 정기적으로 일어났는데 그때마다 그랬습니다.”(조 판사) “나상훈 판사는 기획법관 겸 공보관이었지요. 서울서부지법 집행관사무소 비리와 같이 법원 구성원의 비리가 발생하면 언론 보도에 대비하고 상부의 질문에 대비해야 해서 묻는가 보다 생각한 것이지요.”(피고인 변호인) “네. 저는 이 사건 전에 기획법관과 공보관에게 고마워했습니다. 공보관이 아니면 일선 판사가 직접 언론 대응을 해야 해서요. 그게 사실 어려운 일입니다. 판사들은 재판만 하지, 민원인을 대하거나 언론인을 대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조 판사)
‘피의자 ○○○, △△△ 계좌에서 자기 월급보다 많은 입금 내역이 발견됨(영장전담판사의 전언).’ ‘서울중앙지법 관내 보관업체 등 특정업체가 거론되고 있고, 다른 모든 법원 집행관사무소도 동일한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는 제보자 진술→서울 관내 법원 수사 확대 가능성.’ ‘10월25일 피의자 ○○○, △△△ 체포영장 청구 및 통신사실확인자료 제공 요청 허가 청구.’ ‘□□물류에 대한 압수수색 실시 및 압수물 분석→추가 피의자 입건 및 경우에 따라 타 법원으로의 확대. 압수 결과에 따라 거래처인 서울중앙지법이나 서울남부지법 집행관실로 확대 가능성 있음.’ 영장전담판사의 예상과 달리, 나 판사는 정보를 그러모아 위와 같은 ‘서울서부 집행관사무원 등에 대한 수사 등 상황보고’ 등을 작성했고, 이를 다섯차례에 걸쳐 임종헌 전 차장에게 보고했다. 문건에는 검찰 수사 상황과 구체적 내용은 물론, 수사 확대 가능성을 분석·전망한 나 판사의 의견이 담겨 있었다. 피의자에 대해 체포영장이 청구된 사실까지 포함됐다. 외부로 알려질 경우 피의자로 하여금 증거를 조작하거나, 허위 진술하게 할 우려가 있는 정보였다. 공무상 비밀누설죄가 성립하려면 ‘공무원’인 자가 ‘직무상 취득한 비밀’을 ‘누설’해야 한다. 1심 재판부는 나 판사 개인 의견을 제외한 문건 내용이 외부에 유출됐을 때 검찰 수사에 장애를 초래할 ‘비밀’이 맞다고 인정했다. 당시 대법원 예규(중요 사건의 접수와 종국 보고)에 따라 법원행정처는 각급 법원으로부터 중요 사건의 접수와 처리 결과를 보고받았는데,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 판사가 획득한 수사상 기밀이라고 재판부는 판단한 것이다. 집행관사무원 비리 사건은 기획법관인 나 판사가 대법원에 보고할 대상이었지만 정보의 성격상 ‘수사상 기밀’에 해당한다고 봤다. 이는 또 다른 검찰 수사 정보 유출 사건과 다른 판단이다. 신광렬·조의연·성창호 부장판사는 영장재판에서 수집된 ‘정운호 게이트’ 수사 정보를 법원행정처에 유출한 혐의로 기소됐으나, 올해 2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 과정에서 법원행정처에 전달된 수사 정보가 보호할 가치가 있는 비밀은 아니었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검찰이 법원에 비공식적으로 공유한 내용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고 사법부 내부 보고라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다. 다만, 보고 문건이 나 판사가 직무상 취득한 비밀이 맞다고 해도 이를 법원행정처에 보고한 게 누설에 해당하는지는 더 따져보지 않았다. 나 판사는 기소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고인의) 공범으로 적시된 나상훈은 기소돼 있지 않아 이에 대한 나상훈의 방어권 행사 및 심리가 이뤄지지 않은 이상, 이 사건 보고 행위가 누설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별도로 판단하지 않는다.”(판결문)
재판부는 이 전 법원장이 나 판사와 공모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 전 법원장이 나 판사나 법원 직원에게 수사 기밀을 수집하라 지시하지도, 문건 보고 행위를 승인하지도 않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영장재판에서 수집된 수사 기밀이 임종헌 전 차장에게 직보됐다는 취지로, 이를 사실상 나 판사의 단독 행위라 본 것이다. 이 전 법원장에게 보고했다는 나 판사의 법정 진술이 믿기 어렵다는 게 주요한 이유가 됐다. 2016년 9월13일 첫 보고를 올릴 때 이 전 법원장에게 대면 보고했다는 나 판사 진술이 대표적이다. 4월23일 나 판사의 증인신문 내용이다. “그때 이태종 법원장에게 대면 보고했다고요.”(이 전 법원장 쪽 변호인) “그렇게 기억합니다.”(나상훈 판사) “피고인에게 보고하려면 6시 가까운 시간이 돼야 하는데, 법원장이 그 시간까지 청사에 있나요.”(변호인) “6시 지나 청사에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나 판사) “그럼 대면 보고한 게 맞습니까.”(변호인)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느냐 판단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저는 제 기억에 따라 말했을 뿐입니다.”(나 판사) 재판부는 이런 의심이 타당하다고 봤다. 컴퓨터 기록을 살펴보니, 나 판사가 보고서를 완성한 건 저녁 6시15분. “그날은 추석 연휴 전날이어서 법원장인 이 전 원장이 그 시각까지 청사에 남아 있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기 때문에” 대면 보고했다는 나 판사의 진술이 정확한 기억에 근거한 것인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나 판사의 진술은 부정확한 기억에 의존하거나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이를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려워, 이 전 원장이 각 보고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의문이다.”(판결문) 현직 판사가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는다는 증인 선서까지 하고 증언한 내용이건만, 재판부는 나 판사의 증언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원장(이태종 전 법원장)님께서 내일 인편으로 보내자고 하셨고, 차장님께서도 그렇게 말씀드렸으나 차장님께서 암호 걸어서 메일로 일단 보내달라 하셔서 차장님께 보내드렸습니다.”(2016년
10월18일) “금요일 밤에 원장님(이태종 전 법원장)께 메일로 보고드렸던 보고서입니다.”(10월24일) 나 판사가 이민걸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서울서부지법 총무과에 보낸 메일이 남아 있었다. 나 판사는 이메일을 확인한 뒤, 임종헌 전 차장뿐 아니라
이태종 전 법원장에게도 보고서를 보냈다고 진술을 수정했으나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밖에 재판부는 이 전 법원장에게 검찰 수사를 저지할 의도가 없었고, 총무과 직원에게 수사 관련 기밀을 수집하라 지시한 정황이 없다고 판단했다.
무죄 선고를 받고 법원을 나서는 이 전 법원장의 모습은 ‘사법농단 4연속 무죄’, ‘사법농단 법관 4연승’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언론을 장식했다. 사법농단 재판에서 중요한 건 유·무죄 결론뿐만이 아니다. 결론에 이르는 재판 과정이 사법행정이라는 명분 아래 행해졌던 법원 내부의 위헌적·위법적 행위를 성찰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수사 기밀 공유 행위의 근거가 된 대법원 예규(중요 사건의 접수와 종국 보고)는 “재판 독립이 침해될 우려가 있다” “영장에 대한 종국 보고 등이 문제 됐다”며 폐지됐지만, 과거 그 예규를 오·남용했다는 의혹의 당사자인 피고인들은 형사 재판에서 무죄를 받거나,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영장재판에서 수집된 검찰의 수사 기밀이 법원행정처에 공유돼도 되는가. 이태종 전 법원장의 1심 재판은 풀지 못한 질문을 남겼다. 검찰 항소로 이 전 법원장 사건은 서울고법으로 넘어갔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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